절골은 금평리에서 북쪽으로 약 2.5km 정도 올라가면 나오는 마을이다. 금평 저수지를 넘어 가는 길은 지금도 그리 넓지 않지만, 옛날에는 더욱 좁아 사람들의 접근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특히 일제 때 저수지와 신작로가 생기기 전에는 더욱 그러 했으리라. 김좌진 장군이 청산리 전투에서 협곡에 매복하여 일본군을 크게 물리쳤다는데 흡사 비슷한 지형이 아닌가 한다. 저수지를 지나 산골을 올라가다 보면 약간 넓은 들판이 보이고 산으로 둘러 쌓인 둔덕이 나오는데 이곳이 절골이다. 6.25때 충청도 어느 산골마을이 워낙 외진곳에 있어서 전쟁이 난 지도 몰랐을 정도로 평화로운 마을이 있었다고 한다.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송아지를 보노라면 절골도 아마 그런 느낌이 나는 평화로운 마을이다.
그 마을의 윗쪽에 서동사라는 절이 있다. 절 이름이 서동사라는 것은 최근에 알았다. 어렸을때는 절의 명칭에 대해 누구나 별 관심이 없었다. 다만, 그져 절이 있고 그래서 마을 이름을 절골이라고 했겠지 하는 정도로만 인식하고 있었다. 가끔 그곳으로 소풍을 갔는데, 그럴때면 자의반 타의반으로 절에 관한 전설 같은 옛 이야기를 듣곤 했는데 “신라시대 창건한 절이라든가, 임진왜란 때 칡넝쿨로 절을 감아 위장하여 대웅전을 보호했다”는 등 어린 시절 솔깃하게 호기심을 자극했던 이야기다. 흥미롭기는 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이야기가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 할 길은 없다.
70년대 후반쯤으로 기억되는데 박용문 친구의 아버지가 밭갈이를 하던 중 땅속에서 고려청자가 발견되었다. 방송에도 나왔는데 절골이란 동네가 옛날에 꽤 세도를 부리던 세력이 살던 동네였을 것이라는 추측이 든다. 어쩌면 지금의 금평리를 비롯한 면 소재지보다 더 큰 마을일 수도 있고, 풍수적으로 상당한 가치가 있는 동네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접근로, 사찰, 유적 등 주변환경을 볼때 상당한 저력이 있는 마을인 것은 분명하다..
절골의 화원초등학교 친구는 약 7~8명 정도 되는 것으로 기억된다. 초등학교까지는 약 3km 이상 되는 거리다. 매일 걸어 다니기 때문에 그들의 체력은 엄청 좋았다. 그 때문인지 오전 수업전 또는 점심 쉬는 시간에 축구를 하면 절골 애들이 꽤나 실력이 있었다. 또 어린이들이 등하교 하기에는 비교적 먼거리기 때문에 중간에 가끔 쉬면서 선배들이 지나가는 후배들 군기를 잡는지 상하간 규율이 엄격하기도 하였고 쌈박질도 잘했다.
세월이 흘러 최근 김성연 친구가 화원초등학교 동기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초등학교시설부터 "잠퉁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그가 드디어 리더로써 등장한 것이다. 그리 놀라진 않았다. 까까머리 시절 언젠가 이 날이 올 것으로 예상했다.
사연인즉,
어느 무더운 여름날, 재미없는 영어 시간이었다. 창가 자리에 앉았던 성연학생이 손을 교실 밖으로 내밀고 수업을 듣고 있었다. 마침 하늘을 날고 있던 새 한 마리가 화장실을 찾지 못하고 그만 무단방뇨를 하였다. 그런데 새똥이 교실 밖에 있던 그 친구의 손 바닥에 떨어졌다. 기막힌 타이밍이다. 하늘을 날던 새의 똥이 어떻게 성연의 손 바닥으로 정확히 떨어졌을까? 우연 치고는 너무 놀랍다. 로또 맞는 것 보다 더 어려운 확률이다. 이 기가 막힌 현상을 보고 모든 반 친구들이 까르르 웃었지만 난 그때 생각했다. 언젠가 이 친구를 크게 쓸려고 하늘에서 보내온 어떤 신호가 아닐까. 그후 죽 기다리고 있었다. 그 동안 기대에는 못 미쳤지만 동기 회장으로 선출된 지금이 그날의 신호가 실현된 날이 아닐까. 항상 큰 목소리로 활발하게 의견을 개진하고 분위기를 뛰워 주던 그가 불혹의 나이을 지나, 절골의 명예를 걸고, 이제 본격적으로 능력을 보여 주지 않을까.
by hgp 2011.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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